1879년 오키나와현의 설치는 단순한 행정구역 개편이 아니었다. 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쓰마의 통제도 받았던 류큐왕국의 중층적 지위를 하나의 근대 국가 영토로 바꾼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을 ‘류큐처분(琉球処分)’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처분’이라는 행정용어만으로는 왕국의 해체와 주민들이 겪은 강제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다.
연재 연결 앞선 글에서는 에도시대의 네 개의 창구와 근대 국제법의 수용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주권·국경·영토라는 새로운 언어가 실제로 주변 지역을 어떻게 재편했는지 묻는다.
류큐는 일본이었나, 중국의 조공국이었나
근대 이전의 류큐를 오늘날의 국경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류큐왕국은 명·청 왕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으며 동아시아 해상교역에 참여했다. 1609년 사쓰마번의 침공 이후에는 사쓰마의 강한 통제와 경제적 부담을 받았지만, 왕국의 형식과 청과의 외교 관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를 흔히 ‘양속’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는 류큐가 두 국가에 똑같이 소속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정치적 관계와 의례가 겹쳐 있었다는 설명에 가깝다. 에도 막부와 사쓰마는 류큐의 대중국 관계를 활용했고, 청은 류큐 국왕을 책봉했다. 류큐 왕부 역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여러 관계를 활용해 생존을 도모했다.
왜 메이지 정부는 중층적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나
메이지 정부가 만들려 한 국가는 중앙정부, 국민, 영토의 범위를 명확히 정한 근대 국가였다. 하나의 지역이 일본의 통제를 받으면서 동시에 청 황제에게 조공하는 구조는 단일 주권이라는 원리와 충돌했다. 외국과 조약을 맺고 국경을 획정하려면 류큐의 소속을 모호하게 남겨두기 어려웠다.
1871년 류큐인 표류민이 타이완에서 살해된 사건은 일본 정부가 류큐 주민을 ‘일본 국민’으로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청과의 외교 교섭과 1874년 타이완 출병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주민의 보호라는 논리와 영토 편입의 논리가 결합한 것이다.
1872년: 류큐왕국에서 류큐번으로
1872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 국왕 쇼타이(尚泰)를 ‘류큐번왕’으로 책봉하고 류큐를 번으로 규정했다. 왕국을 즉시 없애지는 않았지만, 류큐의 지위를 일본 국내 제도 안에 놓는 첫 단계였다. 국왕은 일본 정부가 임명한 번왕으로 다시 정의되었고, 류큐와 외국의 관계는 중앙정부가 관리해야 할 사안으로 바뀌었다.
이 조치는 명칭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누가 류큐의 통치자를 승인하는지, 외교문서가 어느 정부를 거치는지, 류큐 주민을 어느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이동시켰다.
1875년: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명령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청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중지하고 중국 연호의 사용을 그만두며, 일본의 법과 제도를 따르도록 요구했다. 류큐 왕부는 도쿄와 청에 사절을 보내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선택지는 점차 좁아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류큐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왕부 관료들은 청과 일본 양쪽에 호소하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가의 승인과 군사·행정력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와 대등하게 협상하기는 어려웠다.
1879년: 왕국의 해체와 오키나와현 설치
1879년 3월 메이지 정부는 처분관 마쓰다 미치유키를 경찰과 군인과 함께 류큐에 파견했다. 쇼타이에게 도쿄 이주를 명하고 왕부의 행정기구를 해체했다. 이어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고 전국에 공포했다. 오키나와현 공문서관은 1872년 류큐번 설치부터 1879년 현 설치까지의 일련의 조치를 정부 문서에 따라 류큐처분이라 설명한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종결되었지만 사회가 곧바로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는 청의 반발과 지역사회의 저항을 의식해 토지·조세·신분제 등에서 기존 관행을 상당 기간 유지하는 ‘구관온존’ 정책을 취했다. 정치적 편입과 사회적 통합 사이에는 긴 시간차가 있었다.
청의 항의와 분도 문제
청 정부는 류큐의 조공 관계를 근거로 일본의 조치에 항의했다. 미국 전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가 중재를 시도했고, 일본과 청 사이에서는 류큐 제도를 나누는 방안도 논의되었다. 일본이 미야코·야에야마를 청에 넘기는 대신 청에서 통상상 권리를 얻는 구상까지 제시되었지만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논쟁은 류큐의 운명이 류큐인만의 의사로 결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과 청이 영토와 통상권을 교환 가능한 대상으로 논의하는 동안, 류큐 내부의 정치적 의사는 주변으로 밀려났다.
근대 영토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류큐처분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국경선을 확인한 사건이라기보다, 여러 관계가 겹친 공간을 단일한 영토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역사적 관계의 일부는 일본 소속의 근거로 강조되고, 청과의 관계는 제거해야 할 잔재로 재해석되었다. 법률, 외교문서, 행정조직, 경찰과 군대가 함께 작동했다.
따라서 근대 국가의 형성을 중앙의 제도 개혁만으로 볼 수 없다. 어느 지역을 영토로 삼고 누구를 국민으로 규정했는지, 그 과정에서 현지의 선택권이 어떻게 제한되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 형성의 역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생각해 볼 쟁점
- 류큐의 중층적 관계를 근대적 ‘소속’ 개념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 주민 보호라는 외교 논리는 언제 영토 확대의 근거로 바뀌는가?
- 1872년과 1879년 가운데 어느 시점을 왕국 해체의 결정적 순간으로 보아야 할까?
- 행정제도의 통합과 주민의 정치적 동의는 같은 것인가?
정리
- 류큐왕국은 청과의 책봉·조공 관계와 사쓰마의 통제가 겹친 중층적 정치체였다.
- 메이지 정부는 1872년 류큐번 설치, 대청 관계 단절 명령, 1879년 오키나와현 설치를 통해 단계적으로 편입했다.
- 이 과정에는 외교 교섭뿐 아니라 경찰과 군사력이 동원되었으며 류큐 왕부의 선택권은 크게 제한되었다.
- 류큐처분은 근대 일본의 영토 확정이 제국 형성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 글에서는 시기를 다시 에도로 돌려, 조선통신사가 전쟁 이후 국교를 회복하고 막부의 권위를 표현한 방식을 살펴본다. 평화 교류라는 의미와 정치적 연출이라는 성격을 함께 읽을 것이다.
참고자료
- 오키나와현 공문서관, 「1879年3月27日 ‘沖縄県’の設置」
- 오키나와현 공문서관, 「琉球処分の勅諭書」 자료 해설
-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外交史料 Q&A 幕末期」
- 波平恒男, 『琉球処分―「沖縄問題」の原点』, 中公新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