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일본이 마주한 것은 새로운 나라들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였다. 에도 막부가 네 개의 창구를 통해 대외 접촉을 관리하던 시기에는 상대에 따라 교역 방식과 외교 의례가 달랐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조약과 함대를 앞세워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만국공법’이라는 규칙을 배워야 했다. 문제는 그 규칙이 모든 나라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연재 연결 이 글은 「에도 일본은 정말 ‘쇄국’이었을까?」의 다음 글이다. 통제된 연결의 질서가 개항 이후 어떤 외교 언어로 재편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이란 무엇인가
‘만국공법’은 오늘날의 국제법에 해당하는 19세기 동아시아의 번역어다.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마틴(W. A. P. Martin)이 헨리 휘턴(Henry Wheaton)의 국제법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해 1864년 청에서 간행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국가의 주권, 영토, 외교사절, 조약, 전쟁과 중립 같은 개념을 한문 어휘로 설명했다.
중요한 점은 서양의 개념이 단순히 일본어로 곧장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양의 국제법 지식이 먼저 한문으로 번역되고, 일본 지식인들이 그 한문본을 읽고 다시 해석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자료에 따르면 막부의 개성소는 1865년 이 책에 훈점과 후리가나를 붙여 간행했다. ‘번역된 지식의 재번역’이 근대 일본 외교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화이질서와 무엇이 달랐나
전근대 동아시아의 화이질서는 중국 황제를 문명의 중심에 두고 책봉과 조공, 예와 명분을 통해 관계를 조직했다. 모든 관계가 실제로 중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정당성과 외교 의례를 설명하는 중요한 문법이었다.
이에 비해 만국공법은 각국을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된 정치체로 상정했다. 원칙상 국가는 법적으로 평등하며, 관계는 조약과 외교문서로 확정된다. 중심과 주변의 위계 대신 국경, 관할권, 조약 당사자라는 개념이 전면에 나왔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교체가 아니라 ‘누가 질서의 정당한 구성원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였다.
국가 간 평등과 불평등조약의 모순
그러나 19세기의 국제법 질서는 실제로 평등하지 않았다. 서양 열강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치외법권, 협정관세, 일방적인 개항 조건을 포함한 조약을 동아시아 국가들에 요구했다. 일본도 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등을 거치며 이 질서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만국공법은 두 얼굴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주권과 국가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언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국’과 그렇지 않은 사회를 구분하고 강대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규칙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힘의 격차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본은 왜 국제법을 빠르게 학습했나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실무자들에게 국제법은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었다. 조약문을 해석하고 외국 공사와 교섭하며 영토와 국민의 범위를 정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었다. 번역서, 외국인 교사, 해외 사절단과 유학생을 통해 국제법과 외교 실무가 빠르게 축적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식 제도와 외교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불평등조약 개정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정리한 자료에서도 메이지 외교의 주요 과제로 국교 수립, 국경 획정, 불평등조약 개정이 함께 제시된다. 국제법을 배우는 일은 서양 열강에 맞서 일본의 주권을 인정받기 위한 국가 건설과 연결되었다.
배운 규칙은 이웃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나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일본은 서양 열강에 대해서는 국가 평등과 주권을 요구했지만, 류큐와 조선, 아이누 사회를 대할 때에는 같은 원칙을 선택적으로 적용했다. 상대를 독립된 조약 당사자로 인정할 것인지, 일본의 영토나 영향권 안에 있다고 규정할 것인지는 법리만이 아니라 힘과 정책의 문제였다.
특히 류큐왕국은 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쓰마의 통제를 받는 중층적 위치에 있었다. 근대 국제법이 요구하는 단일한 주권과 명확한 영토라는 기준은 이 복합적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웠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지위를 단계적으로 일본 국내 행정질서에 편입했고, 1879년 류큐번을 폐지해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국제법의 수용이 제국의 확장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서양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환
만국공법의 수용을 전통이 사라지고 서양 제도가 들어온 사건으로만 보면 변화의 복잡성이 지워진다. 일본의 실무자와 지식인들은 기존의 한문 지식, 번역 경험, 에도시대의 정보망을 활용해 새로운 개념을 이해했다. 동시에 화이질서의 위계와 근대 국제법의 위계가 겹치면서 새로운 불평등도 만들어졌다.
따라서 질문은 ‘일본이 국제법을 받아들였는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더 중요한 질문은 국제법의 어떤 원칙을 누구와의 관계에서 선택해 사용했는가이다. 근대화는 규칙의 수동적 수입이 아니라, 규칙을 해석하고 적용할 권력을 둘러싼 과정이었다.
생각해 볼 쟁점
- 주권국가의 법적 평등은 실제 힘의 격차를 얼마나 줄일 수 있었을까?
- 화이질서와 만국공법은 완전히 단절된 질서였을까,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서로 겹쳤을까?
- 일본은 서양 열강에 요구한 주권 원칙을 류큐와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을까?
- 국제법 지식의 습득은 방어적 근대화와 제국 팽창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정리
- 『만국공법』은 19세기 서양 국제법을 한문으로 번역해 동아시아에 전달한 핵심 텍스트였다.
- 개항기 일본은 국가 주권, 영토, 조약이라는 새로운 외교 언어를 빠르게 학습했다.
- 국가 평등이라는 원칙과 불평등조약이라는 현실은 처음부터 공존했다.
- 일본은 국제법을 서양에 맞서는 도구로 사용하면서 이웃을 재편하는 도구로도 활용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인 ‘류큐처분’을 살펴본다. 왕국·조공·번이라는 중층적 지위가 어떻게 하나의 근대 국가 영토로 정리되었는지가 핵심 질문이다.
참고자료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협동데이터베이스, 「『万国公法』を見たい。」
-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国書・親書にみる明治の日本外交」
-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外交史料 Q&A 幕末期」
- Henry Wheaton,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W. A. P. Martin 한역, 『萬國公法』, 1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