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는 평화를 위한 사절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권위를 보여주는 대규모 외교 의례였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7세기 초 다시 이어졌고,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의 사행이 이루어졌다. 이 여정을 ‘선린우호’라는 한마디로만 정리하면 관계 회복의 의미는 보이지만, 누가 길을 열고 비용을 부담하며 사절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놓치기 쉽다.
연재 연결 이 글은 「에도 일본은 정말 ‘쇄국’이었을까?」에서 살펴본 네 개의 창구 가운데 쓰시마구치를 확대해 읽는다. 통제된 연결이 실제 외교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가 핵심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외교가 곧 회복된 것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포로, 약탈을 남겼고 양국 관계를 끊어 놓았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운 정권의 안정을 위해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다. 조선 역시 피로인 송환과 일본 정세 파악, 변경의 안정을 위해 교섭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침략의 책임을 확인하지 않은 채 곧바로 쇼군에게 사절을 보낼 수는 없었다. 초기 사행이 ‘회답겸쇄환사’로 불린 것은 일본의 국서에 회답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목적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의 재개는 과거가 지워진 결과가 아니라, 전쟁의 상처를 처리하는 실무에서 출발했다.
쓰시마는 왜 핵심 중개자가 되었나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섭은 쓰시마번 소씨가 중개했다. 쓰시마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깝고 대조선 무역 의존도가 높았다. 부산 왜관의 운영, 외교문서 전달, 표류민 송환과 사절 접대를 담당하면서 조선과 막부 사이의 정보와 문서를 연결했다.
이 중개는 단순한 우편 전달이 아니었다. 양국의 외교문서에는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호칭과 위계 표현이 있었고, 쓰시마는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문구를 조정하거나 정보를 선택적으로 전달했다. 중개자가 관계를 가능하게 했지만, 정보의 왜곡 가능성도 함께 만들었다. 에도 외교는 중앙정부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기보다 번의 전문성과 이해관계에 의존한 체제였다.
왜 ‘통신사’라고 불렀나
통신(通信)은 단순히 소식을 전한다는 뜻을 넘어 서로 믿음을 통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통신사라는 명칭에는 전쟁 이후 양국이 다시 신뢰 가능한 외교 관계를 만들었다는 이상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신뢰는 선언만으로 생기지 않았다. 국서의 형식, 사절의 등급, 접대 장소, 선물, 이동 경로를 반복해서 합의해야 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은 외교문서뿐 아니라 여행기, 시문 교류, 행렬 그림 등으로 구성된다. 이 자료들은 통신사가 정부 간 교섭과 함께 지식인·화가·의사·통역관이 만나는 문화 교류의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긴 행렬은 무엇을 보여주었나
통신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해 쓰시마와 세토나이카이를 거쳐 에도로 향했다. 수백 명 규모의 사절단과 일본 측 접대 인력이 이동하는 일은 막대한 비용과 조직력을 요구했다. 길가의 주민에게 이 행렬은 외국 사절을 직접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막부는 통신사의 방문을 쇼군의 권위를 가시화하는 행사로 활용했다. 조선 국왕의 사절이 에도에 와서 국서를 전달하는 모습은 쇼군이 일본 안팎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운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조선은 대등한 외교 관계를 전제로 사절을 보냈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그 행렬이 막부 권력의 위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었다.
같은 의례를 서로 다르게 읽다
조선과 막부는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를 바라보는 세계관까지 공유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명·청과의 책봉 관계 속에서 일본과 교린 관계를 맺었다. 막부는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지 않은 채 쇼군 중심의 대외질서를 구성했다. 같은 국서와 행렬도 각자의 정치적 언어 안에서 다른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조선통신사를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복종한 의례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질서관을 완전히 일치시키지 않고도 문구와 절차를 조정해 관계를 지속한 외교 기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11년, 왜 에도가 아니라 쓰시마였나
마지막 통신사는 1811년 에도까지 가지 않고 쓰시마에서 국서를 교환했다. 막부와 쓰시마번의 재정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접대 규모와 이동 거리를 줄이는 ‘역지빙례’가 채택된 것이다. 외교 의례는 변하지 않는 전통이 아니라 재정과 국내정치의 조건에 따라 조정되는 제도였다.
이 변화는 통신사의 쇠퇴만을 뜻하지 않는다. 수백 년간 이어진 관계가 현실적인 비용 문제에 대응해 형식을 바꿀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의 접근과 개항이 시작되면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전혀 다른 국제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평화의 기록과 정치의 기록
조선통신사 기록이 오늘날 공동의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은 전쟁 후 관계를 회복하고 장기간 평화를 유지한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등재한 자료들은 12차례 사행과 관련된 외교·여행·문화교류 기록을 포괄한다.
그러나 평화라는 가치가 정치성을 지우지는 않는다. 통신사는 신뢰 회복, 무역과 정보 교환, 문화 교류, 막부의 권위 연출, 쓰시마의 생존 전략이 겹친 제도였다. 이 여러 층을 함께 볼 때 조선통신사는 미화된 우호 이야기나 일방적 위계 이야기보다 훨씬 풍부한 외교사의 사례가 된다.
생각해 볼 쟁점
- 전쟁 이후의 ‘화해’는 사과, 포로 송환, 관계 정상화 가운데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 쓰시마 같은 중개자는 갈등을 줄였는가, 아니면 새로운 왜곡을 만들었는가?
- 같은 외교 의례를 양국이 다르게 해석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문화 교류와 정치적 선전은 하나의 행사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가?
정리
-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국교 회복과 포로 송환에서 출발했다.
-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되었고 쓰시마번이 핵심 중개 역할을 맡았다.
- 통신사는 평화와 문화 교류의 통로였지만 막부 권위를 보여주는 정치 의례이기도 했다.
- 조선과 일본은 서로 다른 질서관을 유지하면서 문서와 의례를 조정해 관계를 지속했다.
연재의 다음 방향 이 글 이후에는 ‘쇄국이라는 말은 언제 만들어졌나’처럼 핵심 개념을 좁혀 설명하거나, ‘아코 낭사는 어떻게 근대 일본의 충성 서사로 바뀌었나’처럼 국내 정치문화의 갈래로 확장할 수 있다.
참고자료
- UNESCO Memory of the World, Documents on Joseon Tongsinsa/Chosen Tsushinshi
- 조선통신사 기록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신청서
- 일본 국립공문서관, 「易地聘礼使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