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의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왜 곧바로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1858년의 조약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부는 왜 서명했을까? 이 질문은 일본의 개항을 단순히 ‘서양의 압력에 굴복한 사건’으로만 보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막부는 군사력의 격차, 청의 패전, 국내 정치의 균열, 조약이라는 낯선 외교 형식을 동시에 판단해야 했다.

이 글의 위치: 이 글은 수업에서 다루었다고 단정하는 내용이 아니라, 기존의 에도 일본은 정말 쇄국이었을까와 만국공법은 동아시아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나 사이를 잇기 위해 공식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덧붙인 보충 학습 노트다.

핵심 개념부터 정리하기

  • 개국(開国, かいこく): 외국과의 통교·통상을 확대하는 정책 전환을 가리킨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개국’은 오늘날의 완전한 개방과 같은 뜻이 아니었다.
  •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1854년 체결된 조약으로, 시모다·하코다테 개항과 미국 선박에 대한 보급 등을 정했다. 본격적인 자유무역 조약은 아니었다.
  •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1858년 체결된 통상조약이다. 개항장 확대, 자유무역, 미국 공사의 에도 주재, 영사재판권과 협정관세 등을 포함했다.
  • 불평등조약(不平等条約): 조약 당사국의 권리와 의무가 대등하지 않은 조약을 가리킨다. 일본의 경우 영사재판권과 관세 자주권 제한이 대표적인 쟁점이었다.

페리 이전의 일본은 완전히 닫혀 있었을까

에도 막부의 대외관계는 무관계가 아니라 관리된 관계였다. 나가사키·쓰시마·사쓰마·마쓰마에라는 이른바 ‘네 개의 창구’를 통해 네덜란드·중국·조선·류큐 및 북방 세계와 접촉했다. 따라서 1853년 이전 일본에도 해외 정보와 외교 경험은 존재했다. 문제는 기존 창구가 막부와 여러 번의 역할 분담 속에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들어 서양 선박의 접근이 늘고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기존 방식만으로 해안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일부 지식인은 통상 허용을 곧바로 ‘조법을 버리는 행위’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방 강화와 정보 확보를 위해 제한적인 교류를 검토했다. 즉 개국론과 쇄국론은 처음부터 깔끔한 두 진영으로 나뉜 것이 아니었다.

1853년 페리 내항은 무엇을 바꾸었나

페리(Matthew C. Perry)는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군함과 함께 내항했다. 미국은 표류민 보호, 선박에 대한 보급, 항구 개방 등을 요구했다. 막부는 즉답을 피하고 다음 해 답변하겠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종래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 국서 내용을 여러 다이묘와 유력자에게 공개하고 의견을 물은 것이다.

이 조치는 폭넓은 지혜를 모으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막부가 독점하던 외교 결정의 권위를 흔들었다. 대외 문제는 더 이상 나가사키 같은 특정 창구의 실무만이 아니라 ‘누가 일본을 대표해 결정하는가’라는 국내 정치 문제로 바뀌었다.

1854년 화친조약은 곧바로 자유무역을 뜻하지 않았다

1854년 일미화친조약으로 일본과 미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열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막부가 모든 통상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화친조약은 선박의 보급과 표류민 보호, 제한된 항구 이용에 초점을 두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일본의 개항은 한순간의 전환이 아니라 화친에서 통상으로 단계가 이동한 과정이었다. 막부는 처음에는 제한된 양보를 통해 시간을 확보하고 서양의 의도와 국제정세를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왜 1858년 통상조약까지 받아들였을까

1. 군사력의 비대칭과 전쟁 회피

막부는 서양 함대와 정면 충돌할 경우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청이 아편전쟁과 애로호전쟁을 거치며 서양 열강에 패배한 사실은 현실적인 경고였다. 전쟁을 피하면서 시간을 버는 선택은 단순한 비겁함이라기보다 국가 보존을 우선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2. 하리스가 제시한 국제정세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하리스(Townsend Harris)는 영국과 프랑스가 청과 전쟁 중이며, 그 여세를 몰아 일본에 더 강한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미국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면 미국이 다른 열강의 요구를 중재할 수 있다는 설명도 제시했다. 막부는 이 말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열강이 차례로 도착할 상황에서 먼저 조건을 정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3. 통상 자체보다 조건과 시기를 조정하려는 협상

막부의 외교 담당자들은 개항장의 위치, 외국인의 활동 범위, 통화 교환, 관세와 무역 규칙을 두고 협상했다. 따라서 조약 체결을 ‘아무것도 모른 채 서명한 사건’으로 보는 것도 부정확하다. 다만 국제법과 조약 관행에 대한 정보, 군사력과 교섭력이 대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는 일본에 불리했다.

4. 국내 정치 권위의 위기

통상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막부는 천황의 칙허를 얻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이이 나오스케는 칙허 없이 조약 체결을 단행했다. 이 결정은 외교 문제를 막부와 조정 사이의 주권 문제로 확대했다. ‘외국과 어떤 조약을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누가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결합하면서 막부 말 정치적 동요가 커졌다.

무엇이 불평등했는가

일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 공사의 에도 주재, 에도·오사카의 개시, 가나가와 등 항구의 개항과 자유무역을 규정했다. 특히 외국인이 일본 법정이 아니라 자국 영사의 재판을 받는 영사재판권, 일본이 관세를 독자적으로 정하기 어려운 협정관세가 핵심 문제였다.

여기에 최혜국 조항과 여러 나라와의 유사한 조약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안세이 5개국 조약 체제에 들어갔다. 불평등성은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사법권과 경제정책 결정권이 제약된다는 구체적인 법적 문제였다. 이후 메이지 정부가 조약 개정을 국가적 과제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국제질서 인식은 어떻게 달라졌나

개항 전 일본의 대외관계는 창구와 상대에 따라 서로 다른 관행으로 운영되었다. 조선과의 통신, 류큐를 통한 관계, 나가사키 무역과 북방 교섭은 하나의 보편적 규칙 아래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서양 열강은 조약문, 공사 주재, 영사, 개항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일본을 단일한 외교 주체로 다루려 했다.

개항 이후 막부는 외국봉행을 두고 대외업무를 중앙에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은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조약의 문구와 국제법 개념을 학습했고, 그 규칙을 이용해 수정과 개정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은 화이질서와 지역별 교섭 관행이 곧바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기존 질서 위에 서양식 조약체제가 겹쳐지면서 서로 다른 규범이 충돌하고 번역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보충 설명: ‘굴복’과 ‘능동적 선택’ 사이

개항을 전적으로 자발적인 근대화로 설명하면 군사적 압력과 조약의 불평등성이 가려진다. 반대로 모든 결정을 강압에 의한 수동적 굴복으로만 설명하면 막부 관료의 정보 수집과 협상, 전쟁 회피와 시간 확보의 판단을 볼 수 없다.

보다 정확한 이해는 두 요소를 함께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일본은 힘의 비대칭 속에서 선택했지만, 선택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막부는 국가를 보존하고 교섭 시간을 확보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내린 결정이 국내 정치의 정당성 위기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수업에서 생각해볼 쟁점

  • 전쟁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불리한 조약을 맺는 것은 현실적인 외교인가, 주권의 포기인가?
  • 1854년 화친조약과 1858년 통상조약을 하나의 ‘개국’으로 묶으면 무엇을 놓치게 되는가?
  • 막부의 의견 수렴은 정치 참여의 확대였을까, 통치 권위 약화의 시작이었을까?
  • 서양식 조약체제의 수용은 일본을 동아시아 질서 밖으로 이동시켰을까, 아니면 여러 질서가 공존하게 했을까?
  • 불평등조약을 경험한 일본이 이후 조선·청과 맺은 관계를 볼 때 어떤 연속성과 역전이 나타나는가?

정리

일본이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군사력의 격차와 청의 패전, 복수 열강의 접근, 통상 압력, 국내 정치의 분열이 동시에 작용했다. 막부는 제한된 화친에서 통상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며 전쟁을 피하고 시간을 확보하려 했지만, 칙허 없는 조약 체결은 외교 결정의 주체를 둘러싼 정치 위기를 키웠다.

개항은 일본이 갑자기 세계를 발견한 사건이라기보다, 기존의 복수 창구 중심 대외관계가 조약과 국제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외교질서와 충돌한 사건이었다. 다음 단계에서는 일본이 번역한 만국공법과 조약 개정 논리를 통해, 불리하게 들어간 규칙을 어떻게 학습하고 다시 활용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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